티스토리 뷰

반응형

로마인 이야기 제1권 요약 정리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ROMA NON UNO DIE AEDIFICATA EST.

   

 

 

로마인 이야기 1-15권을 읽는 데 도움을 드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차근 차근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양사를 살펴보고, 우리 시대의 시민으로써 깊은 생각과 삶에 적용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 다음에  또 다시 다른 역사를 살펴서 인문학적인 지식을 넓혀가면 유익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전쟁에 관련된 내용은 일단 책을 보다가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전쟁영화를 보면서 읽으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목차

 

1. 제1장 로마의 탄생

2. 제2장 로마 공화정

3. 마치면서

 

1장 로마의 탄생(18-76P)

 

로마건국 신화

 

여기서는 로마의 왕정을 다룬다. 로마 왕국과 로마 제국의 기초를 놓은 로마 왕국의 7명의 왕에 대한 이야기와 주요 사건을 이야기 한다. 모든 나라들은 시조가 되는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다. 로마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에서 트로이가 패배하면서 트로이에서 도망쳐 이탈리아 반도로 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인 로물루스가 건국했다는 신화다. 로물루스(Romulus)는 처음엔 늑대 무리에서 자라다가 양치기들에게 발견되어 쌍둥이 동생인 레무스(Remus)와 함께 양치기로 성장하게 되고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후에 동생 레무스 세력과의 전쟁에서 로물루스(Romulus)가 승리하면서 로마 왕국의 초대 왕이 된 것이다.

 

 

1대 왕 로물루스(BC. 753~716)

 

B.C 753년 로물루스(Romulus)의 이름을 따서 왕국의 이름을 로마(Roma)라고 했다. 당시는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반도 주변에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어져 있었고, 선진국이었던 그리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제 갓 태어난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위치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의 이탈리아의 그리스 사이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들 거대 세력들이 로마를 굳이 자신의 세력권에 넣어야 할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초대 왕 로물루스는 왕이 된 후에 다른 권력자들과 달리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정을 3개 기관으로 나누었는데, 왕과 원로원(元老院) 그리고 민회(民會)로 권력을 분산했다.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에 로물루스는 3권 분립을 기본 틀로 만들어 국가를 운영했던 것이다. 또한 왕권마저도 세습하지 않았다. 왕을 민회에서 선출하게 했다. 로물루스는 당시 주변 국가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병력을 확보함으로써 빠르게 인구 증가를 이루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속국에 대해서도 로마시민권과 심지어는 원로원(元老院) 의석도 배정했던 것이다.

 

2대 누마(BC. 715~673)

 

그는 로마로 이주해 온 사비니족이었지만 원로원(元老院)의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제2대 왕으로써 추대 되었다. 로마의 왕은 그 시대의 최강국 이집트의 파라오나 메소포타미아의 왕과 같이 신과 같은 존재나 신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존재로 추앙되지 않았다. 로마의 왕은 로마 공동체의 뜻을 구현하고, 로마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대표자였다는 것이다. 2대 와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나라의 건전함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전쟁으로 국가의 재정이나 식량을 충당해야 했던 시대였는데, 누마는 백성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서 농사의 생산량을 늘려 전쟁 없이도 식량을 충당하게 한 것이다.

 

누마가 지은 신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전쟁의 신이요 출입문의 수호신인 야누스의 신전이다. 전쟁이 있으면 야누스 신전의 문은 열려 있고, 전쟁이 없으면 문은 닫혀 있게 되는데, 로마의 2000년 역사 중에 이 문이 닫힌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로마의 백성들의 일상에 농사와 질서를 위해 달력을 만들었다. 1년을 12달로 날 수를 355일로 정하고, 남은 날은 20년에 한번 결산했다.

 

 

 

3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BC. 673~642)

 

그는 왕이 되자마자 라틴족의 발상지이자 선조의 땅이라고 여겼던 알바롱가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알바롱가는 400년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독립 국가였다. 알바롱가 점령은 단순한 이웃의 부족을 공략한 것과는 달리 향후 로마가 라틴족의 조국이라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4대 안쿠스 마르티우스(BC. 640~616)

 

그는 2대 왕이었던 누마의 외손자였다. 그는 순수 로마 출신이다. 25년의 치세동안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했다. 테베레 강에 최초로 다리를 놓고, 테베레 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했다. 로마는 드디어 지중해를 마주보게 되었다. 오스티아에는 모래밭에서 소금이 생산되는 해변이 있었는데, 당시 화폐로 사용될 정도로 소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 지역의 점령은 로마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가 있다.

 

 

 

5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BC. 616~579)

 

그는 최초로 선거운동을 한 왕이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했고, 그래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의하면,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 로마 전역에서 연설을 하였고, 자기에게 표를 던져 달라고 시민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선거운동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왕이 되자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원로원의석 수를 기존의 100석에서 200석으로 늘렸다. 그는 또한 간척 사업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사업을 활발히 했다. 팔라티누스 언덕 북쪽에 펼쳐져 있는 저지대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물처럼 뻗어 있는 습지대였다. 지하수로를 테베레 강까지 연결하여 모인 물의 배수문제는 해결되었다. 평지에는 광장이나 공공 건축물을 세우게 되는데,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이 사업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그는 로마의 부의 확대와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정적들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6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BC. 578~535)

 

현재까지 로마에 남아 있는 세르비우스 성벽을 완성한 인물이다. 세르비우스는 군사적인 성공도 이루어 냄으로써 로마는 주변 부족들 중에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로 우뚝 서게 된다. 한편 세르비우스의 최고의 업적은 군제 개혁이다. 이를 위해 그는 로마 역사 이래 최초로 인구 조사를 단행한다. 또한 그는 병법을 확립했다. 당시의 전투에선 별다른 병법이 없이 그냥 마구잡이식 전투가 일반적이었는데 로마군은 전위부대, 본대, 후위부대로 삼분하여 각기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던 그의 치세도 불구하고 암살에 의해 죽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군사개혁과 세제개혁, 그리고 선거제도 개혁일 것이다.

 

 

 

7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BC. 535~509)

 

5대왕이었던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다. 이 거만한 왕은 선왕인 세르비우스의 장례를 금지하고, 그를 지지했던 원로원(元老院) 의원들을 숙청했다. 그는 내정에는 매우 미숙했지만, 군 지휘관의 능력은 매우 탁월했다. 전투에 나갈 때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가 제거된 것은 국내에서 벌어진 스캔들이 원인이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섹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다. 섹스투스의 루크레티아 강간 사건은 루크레티아가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고 숙적이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에 의해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잃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아들 섹스투스는 살해당하여 죽게 된다. 이로써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세웠던 로마 왕국은 244년의 역사를 끝으로 기원전 509년에 끝난다. 이제는 왕 대신에 2명의 집정관(執政官)1년 임기로 국정을 운영하는 공화정으로 거듭난다.

 

로마의 왕정은 시대마다 적절한 왕이 완벽하게 등용되었다. 로마는 이 왕정 시대에 든든한 뿌리를 땅 깊이 내린 나무와 같다. 왕들은 저마다 장수했고, 자신들의 포부를 실행에 옮겼다. 선왕의 업적 위에서 새로운 업적을 쌓은 것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정욕에 의하여 여인은 가슴에 칼을 꽂았고, 더러운 정욕을 이기지 못한 섹스투스는 비참하게 살해당해 죽고 마지막 왕은 로마에서 추방된다. 이로써 로마의 왕정은 생명을 다하게 된다.

 

 

 

 

제2장 로마 공화정(Res publica Romana)

 

 

공화국으로 이행한 로마

 

본서의 제2장은 공화정(共和政)으로 거듭난 로마가 그 유명한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기원전 264-146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에 의해서 향후 500년간의 로마 공화정 정치체제가 시작된다. 공화정은 기존의 왕정에서 한 명의 왕이 종신으로 권력을 가지는 것과는 달리 임기 1년으로 두 명의 집정관(執政官)이 기존의 왕이 하던 일을 대신했다. 물론 집정관(執政官)은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선출직이었다. 브루투스는 원로원 의원을 기존 200명에서 300명으로 확대한다. 이는 신흥 귀족세력의 원로원 참여가 가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집정관 중 한명이었던 브루투스는 왕정 복권을 원했던 일부 귀족세력과 로마 시민에 의해 쫓겨났던 타르퀴니우스를 도왔던 에트루리아 간의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전투의 결과는 로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공화정 로마 초기는 왕정 복귀를 원하는 세력과 공화정 로마의 끝없는 전투로 점철된다. 다행히 대부분의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공화정 로마는 그 정치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공화정의 씨를 뿌린 것은 브루투스, 뿌리를 내리게 한 사람은 집정관(執政官)이었던 푸블리콜라할 수 있겠다. 평소에는 두 명의 집정관(執政官)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통치를 하지만, 국가가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면 임기 6개월의 독재관(獨裁官)을 세워서 위기를 극복하도록 절대 권력을 주었다. 이때에는 집정관(執政官)마저도 독재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공화정 초기부터 100여 년 동안은 귀족계급과 평민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평민계급의 이익을 수호하고 그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호민관(護民官)제도를 만들게 된다. 호민관(護民官)은 평민계급 출신의 대표 2명이 직책을 수행하게 되는데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로마의 계급은 귀족계급, 평민계급, 노예계급을 크게 나뉘어졌다. 귀족계급은 로마 왕국 제1대 왕, 로물루스 때 만든 원로원 100인의 가문과 그 이후의 원로원 의원들이 속한 가문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한편 이들로 부터 자신들의 사업에 대해서는 후원과 도움을 받던 클리엔테스가 있었다. 이 둘의 관계는 세습되었다. 평민계급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시민으로써의 권리와 함께 군역의 의무를 지는 계층이다. 평민계급 중에는 군역을 지지 않는 플로레타리 계층도 있었다. 노예계급은 자유인이 아니었고 시민권도 없었다.

 

기원전 5세기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B.C 449년)이 만들어지기까지 로마는 불문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당시의 법률 선진국이었던 그리스로 3명의 시찰단을 1년간 파견하여 배워오도록 한다. 제정된 12표법은 개정의 필요성이 있더라도 개정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하게 되는데, 신법이 제정되면 신법에 어긋나거나 층돌 되는 구법은 효력을 상실했다.

 

 

 

켈트족의 침략

 

공화정 로마가 맞게 되는 최초의 위기는 북방 켈트족의 침략이었다. 로마는 이들과의 전쟁(기원전 390년 테베레 강 전투)에서 참패하게 되고 로마까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간신히 그들과의 협상을 통해 켈트족은 철수하게 되고 이후 40년 동안 파괴된 로마의 재건 사업이 이루어진다. 이 전쟁은 당시 승승장구하던 로마인들에게 자신의 조국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자각하게 만들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아테네,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 제국에 패배하는 것을 보면서 폴리스 국가는 단명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도 얻게 된다.

 

 

 

과두정치로의 변모

 

기원전 390년 이후 로마인들은 로마의 재건과 국경안전 확보 그리고 내부의 가장 큰 문제였던 계급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개혁을 하게 된다. 국가 방위는 당대 최고의 군사령관이었던 카밀루스를 독재관(獨裁官)으로 다섯 번 임명하여 안정화 시켰다. 그는 켈트족과의 전쟁 중 배신한 동맹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면서 로마인들의 자신감을 회복시켰고 국경안전 확보도 이루어 냈다. 과감한 정치개혁을 감행하여 내부 갈등을 봉합하는데, 기존의 12 표법 대신에 리키니우스 법을 제정한다. 임기 1년의 2명의 집정관 제도 확립, 공화국 모든 요직에 평민 출신도 오를 수 있도록 개방, 중요 요직을 거친 사람은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고, 호민관도 원로원의원이 될 수 있도록 개방했다. 이로써 로마는 귀족 정치가 아닌 명실상부한 과두 정치로써 그 체제가 완전히 변모하게 된다.

 

 

 

동맹국, 그리고 도로 건설

 

내정의 정치 체제를 완비한 로마는 외치 즉 동맹국과의 관계도 바꾸었다. 기존의 라틴동맹의 틀을 깨고 로마가 동맹의 중심에 있고 동맹국간의 모든 갈등이나 문제에 관여하여 통제함으로써 외세의 침략에서 쉽게 동맹이 깨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로마연합을 만들었다. 심지어 패자까지도 동화시키는 생활방식은 바꾸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로마를 강대하게 만든 첫째 요인이다. 정치 체제뿐만 아니라 로마인들은 당시의 다른 민족과 달리 도로가 국토의 지리적인 동맥임을 알고 있었다. 무려 2300년 전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 국가를 연결하는 가도 (오늘날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 우리가 잘 아는 비아 살라리아’(소금길), ‘비아 라티나’(라티나로 가는 길), ‘비아 아피아’(아피아 가도)와 같은 길을 건설했다. 인마가 지나갈 정도의 길로 확장, 보수, 보완 하는 방법으로 도로 건설을 꾸준히 했다.

 

 

 

로마의 시민권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인들과 연합국, 향후 제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동산과 부동산에 대한 권리 보장, 매도와 매수의 권한도 주어졌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법에 따른 재판을 받을 권리,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 끝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증명했다. 그들의 의무는 16~40세 까지의 현역 복무, 60세까지 예비역 복무의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시민권 역시 매우 개방 되어 있었다. 노예였던 사람들도 주인이 자유인으로 놓아 주게 되면, 그 자녀들부터는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로마의 동맹국 국민이라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중 국적도 허용되었다.

 

 

 

통일국가 완성 : 루비콘 강에서 메시나 해협까지

 

켈트족과의 전쟁 이후 두 번째로 로마에게 치욕을 안겨준다. 산악 민족인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5년 후 기원전 316년 치욕을 씻기 위한 2차 전쟁은 기원전 304년 마침내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로마는 당시 전투에서 자신들을 재차 배신한 일부 동맹국에 대해 무자비한 파괴를 감행한다. 이로써 2차 강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삼니움족은 6년 후 다시 로마와의 전쟁을 선언한다. 삼니움과의 3차 전쟁은 기원전 270년 삼니움족이 항복함에 따라 로마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한 로마는 이제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국가였던 타렌툼을 공격하게 된다. 타렌툼은 병법의 천재라는 그리스 폴리스 중 하나인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불러들이게 되고, 로마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하지만 패배를 통해 끊임없이 교훈을 얻고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로마에게는 결국 피로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낟. 타렌툼은 기원전 273년 마침내 함락된다. 이 승리 후에 아피아 가도는 타렌툼까지 연장되는데, 이로써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까지의 아피아 가도는 완성된다. 기원전 270년 마침내 로마는 도시국가를 벗어나 북으로는 루비콘 강에서 남으로는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통일국가가 되었다. 로마를 건국한 후 50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로마의 신분제도

 

공화정 초기의 로마는 귀족계급, 평민계급, 그리고 노예계급의 세 신분으로 구분된다. 각 계급간의 구별이 매우 엄격하였지만 타르퀴니우스 왕가를 추방한 후 평민과 귀족은 일치단결했다. 귀족계급도 민주적 정신을 따르고 있었으며, 여전히 귀족계급은 타르퀴니우스 왕가를 두려워했고, 평민을 학대하면 평민세력에도 유했다. 자신의 세력에게 유리한 점을 염두해 둔 것이다. 타르퀴니우스 왕가가 무너지자 귀족계급의 사람들이 지닌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자 온갖 방법으로 평민들을 괴롭히는 자들로 변질되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원로원을 비롯한 고위정무관과 관직을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공화정 초기의 로마 정치체제는 실질적으로는 귀족정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호민관제도

 

평민들의 법적인 평등과 정치권력에 참여하는 방식은 투쟁이다. 기원전 494년에 평민의 귀족에 대한 투쟁의 성과로서 호민관이 설치되었다. 호민관은 평민계급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는 직책이다. 따라서 평민계급 출신이 아니면 호민관이 될 자격이 없었다. 호민관은 귀족계급이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민회가 아니라, 별도로 구성된 평민집회에서 선출되었다. 임기는 1, 정원은 2명이었다. 평민계급과 이해를 달리하는 귀족계급 중에서 호민관을 해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민관은 집정관(執政官) 조차도 갖지 못했던 신체불가침이라는 특별한 권리까지 부여받았다. 호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집정관이나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권리가 주어졌다.

 

평민의 이익을 지키는 동시에 평민계급의 의견을 국정에 반영시킬 수도 있는 호민관 창설은 평민 쪽의 완전한 승리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평민들의 투쟁에 대한 귀족들의 교묘한 대처 방법이었다. 로마는 거의 해마다 외적과 전쟁을 되풀이해온 나라다. 다시 말해 호민관이 자신의 최대 권리인 거부권을 행사 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는 뜻이다. 호민관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국가 관직인 만큼, 단순히 평민의 선두에 서서 귀족과 대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리를 놓는 중개 역할도 맡았다. 로마에 일시적이나마 국론의 일치를 가져다주었다.

 

 

 

로마의 첫 성문법 12

 

기원전 451년 그리스를 시찰하고 돌아온 3명의 원로원을 포함한 10인 위원회의 노력으로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로마의 첫 성문법이 12)로 제정되었다. 성문법의 제정으로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운영이 배제되었지만 기존에 있던 관습법을 성문화 했을 뿐, 새로이 추가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성문법에 대한 기대를 배신당한 평민계급은 투쟁을 계속했고, 성문법 제정이라는 명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던 10인 위원회는 붕괴되었다. 기원전 445년에는 귀족과 평민의 통혼이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가문과 성장기의 가정환경은 교육제도가 충실하지 않은 시대의 교육기관이 된다. 이로써 평민계급의 인재 육성에 도움이 되었다.

 

 

 

리키니우스 법

 

마침 그리스 땅에서 폴리스가 쇠퇴했다. 평민과는 대결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완고한 보수파도 자신들의 배타성의 폐단을 깨닫는다. 또한 귀족과 평민의 통혼이 분명한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해 평민계급에서도 인재가 배출되었다. 기원전 376년, 로마 역사상 획기적인 리키니우스 법이 제정되었다. 앞으로도 과두정치(소수 지도체제)로 해나갈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공화국 정부의 모든 요직이 평민에게 개방되었다. 최고 공직을 뽑는 선거에 입후보 권한을 모든 시민에게 허용하는 법률이 통과된 것이다. 집정관 중 한 사람이 평민으로부터 선출되게 된 후, 연달아 독재관, 감찰관, 법무관 등의 고위관직이 평민에게 개방되고 귀족들이 끝까지 독점하려 했던 신관직도 평민에게 개방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이 제정

 

평민들의 발전을 제약하는 법률적 제한이 철폐되자 귀족과 다름없는 힘을 갖게 된 부유한 평민들은 한때는 함께 귀족들과 싸웠던 빈민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관직을 귀족과 평민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목적이었던 이 법이, 결국은 평민세력간의 불평등을 조장했다. 차별을 폐지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조치가 거꾸로 차별을 정착시켜 버린 것이다. 평민계급의 계속되는 투쟁으로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의 제정으로 평민회의 결정이 원로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아도 그대로 법으로 인정되게 되었다. 이로써 평민회는 정식으로 어엿한 입법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실질적인 민회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평민과 귀족의 권한이 거의 동등하게 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제도에는 너무 많은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규제가 제도화되었다. 한편 그 제도들은 궁극적인 면에서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제도적 기능을 발휘했다. 공화정 정치체제에 있어서 평민도 처음으로 국가적 권력구조의 구성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의 제정으로 귀족과 평민의 법률상 평등이 실현되었다.

 

이로써 귀족과 평민의 200여 년 간에 걸친 오랜 신분 투쟁은 대체로 끝이 났다. 신분투쟁을 거친 이후에 평민은, 폭력을 최소화하고 정당한 법 절차를 밟아서 그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 과정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피 흘렸던 계급투쟁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로써 로마는 모든 시민을 공동체적인 일체감으로 견고하게 결속했다. 그러한 일체감으로 로마의 시민공동체와 그것을 바탕으로 조직된 시민군은 로마의 팽창에 큰 힘이 되었다. 격심한 계급투쟁이나 유혈적인 사회혁명의 양상이 나타나지 않고, 귀족과 평민의 절충과 타협과 양보로써 그러한 단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팽창에 크게 공헌했다. 이어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기원전 264-146)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서방을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등을 정벌하여 마침내 거의 모든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면서

 

오늘날 각 국가가 더 이상 영토를 팽창하여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즉 지난 세기까지 있었던 제국주의적인 사상이 지배하던 때와는 다르게 각 나가라 영토를 거의 확정하고, 더 이상 외부로 팽창하지 않으며, 각 나라마다 자체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강한 나라가 되어서 주변국을 침량하고 지배하던 그런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로마의 팽창주의를 찬양할지 몰라도 이제 그런 저열한 시대를 지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이 책을 쓴 것처럼 여겨진다. 즉 일본의 극단적인 우익의 사상에 상당히 옹호적인 입장에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1-15권을 전체적으로 읽을 때 이런 관점을 가졌으면 좋을 것 같다. 이것이 본서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흥미롭게 썼다. 그래서 TV에서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이렇게라도 로마 역사를 한 번 깊이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한 번쯤 읽기를 권한다. 오늘날 일본의 행태를 보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이 더욱 향상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ROMA NON UNO DIE AEDIFICATA EST!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1권 #로마인 이야기 요약정리 

반응형